디지털 사피엔스

디지털 사피엔스 ①기억의 기술, 인간의 유산 – 사피엔스에서 디지털까지

steady-always 2025. 10. 30. 21:00

1. 인류의 시작과 기억의 기술 사피엔스의 첫 진화

사피엔스에서 유발 하라리는 인간은 허구를 믿을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이라 말했다. 이는 단순한 신화나 종교를 뜻하지 않는다. 인류는 생존을 위해 기억을 사회적으로 공유해야 했고, 그 과정에서 상상과 기록을 발명했다. 사냥감을 어디서 발견했는지, 계절이 언제 바뀌는지, 누가 믿을 수 있는 동료인지이 모든 정보는 집단의 생존을 결정했다. 기억은 개인의 뇌 안에서만 존재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인간은 기억의 확장체를 만들었다. 동굴 벽화, 돌무늬, 상징 기호 등은 곧 인류 최초의 기술이었다.

이때의 기억은 단순히 과거를 보존하기 위한 장치가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가 누구인가를 정의하는 도구였다. 사피엔스는 언어를 통해 현실에 없는 개념조상, , , 공동체을 이야기할 수 있었고, 그 이야기를 통해 협력했다. 이 협력은 수만 년의 진화보다 빠르게 인류를 성장시켰다. 결국 기억을 기록할 수 있는 능력은 인간이 신을 대신해 시간을 지배하게 한 기술이었다.

하라리는 이러한 과정을 **‘인지혁명’**이라 불렀다. 인간은 허구를 통해 보이지 않는 질서를 창조하고, 그것을 기억하며 유지했다. 불멸한 신과 조상의 존재는 실제로 보이지 않지만, 모두가 그 기억을 공유하기에 사회가 존속할 수 있었다. 이렇게 기억된 허구는 문명을 가능하게 했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디지털 데이터 역시 이 흐름의 연장선에 있다. 우리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 세계네트워크와 서버 속에 우리의 흔적을 저장하고 믿는다.

인류의 기억은 돌 위에서 시작해, 지금은 클라우드 위에서 지속된다. 그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단지 매체만 달라졌을 뿐이다. 인간은 잊지 않기 위해 기록했지만, 동시에 기록을 통해 자신을 확신하려 했다. ‘나는 존재한다는 사실을, 눈에 보이는 흔적으로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결국 기록의 시작은 생존을 위한 기술이자, 존재를 확인하려는 인간의 근원적 불안의 산물이었다.

디지털 사피엔스 ①기억의 기술, 인간의 유산 – 사피엔스에서 디지털까지

2. 문명과 권력의 기억 기록이 만든 세계

인류가 언어를 문자로 옮기기 시작한 순간, 기억은 돌이킬 수 없는 전환을 맞았다. 문자 이전의 말은 공기 속에서 사라졌지만, 문자는 시간 위에 남았다. 그것은 단순한 보존이 아니라 통제의 기술이었다. 메소포타미아의 점토판은 거래 내역을 기록하는 동시에, 누가 세금을 내야 하는지를 결정짓는 권력의 상징이었다. ‘기억할 수 있는 자지배할 수 있는 자가 되었다.

사피엔스는 이 시기를 인지혁명의 완성이라 부른다. 인간은 이제 기억을 머릿속이 아니라 매체에 저장하며, 집단을 조직하고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 그 결과 기록은 단순한 정보의 집합이 아니라, 문명의 기반이자 사회적 질서의 도구로 발전했다. 왕은 연대를 기록했고, 종교는 경전을 만들었으며, 학문은 문헌 위에 세워졌다. 인간은 기록을 통해 시간의 주인이 되었지만, 동시에 그 기록에 속박되기 시작했다.

기록은 진실을 남기기도 하지만, 진실을 선택하기도 한다. 누가 무엇을 기록하느냐에 따라 역사가 달라졌다. 사피엔스에서 하라리는 기록은 인간이 신의 언어를 빌려 쓰는 방식이라 했다. 문자 체계는 그 자체로 권력이자, 집단의 기억을 결정하는 규칙이었다. 그러나 종이는 한계를 지녔다. 기억은 더 많이, 더 빠르게 남길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인쇄술과 산업혁명이 기억의 대량생산을 이끌었다.

기록의 발전은 동시에 인간 정체성의 확장을 의미했다. 문명은 기록 위에 세워졌고, 기록을 남기는 행위는 곧 인간이 세계를 재구성하는 행위였다. 그러나 기억의 주도권이 권력층과 제도에 집중되면서, 개인의 기억은 점점 배제되었다. 현대 사회의 데이터베이스와 행정 기록 체계는 그 연장선에 있다. ‘기억의 민주화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기억이 다시 제도에 흡수되는 과정이다. 인류는 문명을 세웠지만, 동시에 문명 속에서 기억의 자유를 잃었다.

 

3. 디지털 기억의 탄생 영원히 남지만 쉽게 잃는 것들

21세기, 인간의 기억은 전자 신호로 바뀌었다. 종이 위의 잉크가 아니라, 서버의 전류가 우리의 존재를 보존한다. 사진은 클라우드에, 감정은 SNS 게시물에, 생각은 검색 기록에 남는다. 사피엔스의 다음 장인 호모 데우스에서 하라리는 인간이 결국 데이터의 신을 만들 것이라 예견했다. 그것은 지금의 현실이 되었다.

디지털 기억은 불멸을 약속하는 듯 보이지만, 실은 가장 불안정한 형태다. 하드디스크의 고장, 계정의 삭제, 플랫폼의 폐쇄 한 번으로 우리의 흔적은 순식간에 사라진다. 더구나 오늘날의 기억은 우리가 선택해 남기는 것이 아니라, 알고리즘이 자동으로 저장하고 분류한다. 우리는 더 이상 기억의 주체가 아니다. 우리는 기억당하는 인간, 즉 데이터로 환원된 사피엔스가 되었다.

이 디지털 기억은 또한 새로운 형태의 존재 증명이 되었다. 사람들은 하루에도 수십 번 자신을 기록한다. SNS의 게시물, 메시지, 클릭 패턴까지 모두 나의 흔적이다. 그러나 이 흔적들은 나를 설명하는 동시에, 나를 대체하기 시작했다. 하라리가 경고했듯, 인간은 자신이 만든 데이터에 종속될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사람들은 기억되기 위해 살고’, ‘기록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끼는시대에 살고 있다.

그리고 죽음조차 이 흐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사망자의 계정은 디지털 유산으로 남고, AI 기술은 그 사람의 언어와 말투를 학습해 디지털 복제 인간을 만들어낸다. 이제 기억은 단순한 데이터가 아니라 죽음 이후의 존재 방식이 되었다. 인간은 영생을 신에게서가 아니라, 데이터베이스에서 찾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그 불멸은 완전하지 않다. 서버가 닫히면 그 존재도 사라진다.

이처럼 디지털 기억은 불멸과 소멸의 경계에 존재한다. 과거의 신화가 신의 영원함을 상징했다면, 오늘의 신화는 데이터의 영속성을 믿는 것이다. 그러나 데이터는 결코 영원하지 않다. 디지털 기억은 한편으로 인류가 기술에 기대어 신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이 만든 가장 취약한 형태의 영생이다.

 

4. 디지털 유산의 시대 인간은 다시 신이 될 것인가

이제 우리는 묻는다. “기억은 누구의 것인가?” 사피엔스의 마지막 장이 인류의 미래를 묻듯, 지금의 디지털 시대는 기억의 윤리를 다시 질문한다. 우리가 남긴 사진, 기록, 메시지는 나의 소유인가, 아니면 플랫폼의 자산인가? 한병철은 투명사회에서 모든 것이 기록될수록, 인간의 내면은 사라진다고 말했다. 디지털 기억이 완벽해질수록, 인간은 오히려 잊을 자유를 잃는다.

하지만 망각은 인간다움의 본질이었다. 하라리는 기억보다 중요한 것은 이야기의 선택이라 했다. 인간은 모든 것을 기억하는 존재가 아니라, 기억을 통해 자신을 재구성하는 존재다. 그렇다면 디지털 유산의 시대에 필요한 것은 기술이 아니라 철학이다. 우리는 데이터를 남기는 법보다, 어떤 기억을 남길지 결정하는 힘을 길러야 한다.

기술은 인간에게 신의 능력을 주었지만, 동시에 신의 고독도 안겨주었다. 디지털 불멸의 시대에 모든 것을 남긴 인간은 사실상 자신을 잃은 인간이다. 우리의 SNS는 무수한 과거의 분신을 만들어내고, 우리는 그중 어느 것이 진짜 인지 혼란스러워한다. ‘의 흔적은 늘 남지만, 그 안의 의식은 점점 공허해진다.

결국 인류는 신이 되려는 욕망으로 기억을 완벽히 기록하려 했다. 그러나 신이 되는 순간, 인간성은 희미해진다. 디지털 유산은 인류가 만든 마지막 기억의 형태이자, 인간이 기술로써 신의 자리를 넘보는 상징이다. 이제 우리는 다시금 선택해야 한다. “영원히 남을 것인가, 아니면 인간으로 남을 것인가.” 기억의 진화는 끝났지만, 기억의 윤리는 이제 막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윤리는, ‘기억의 완성이 아닌 망각의 선택에서 다시 시작될 것이다.

오늘날의 디지털 유산은 단순한 데이터의 축적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을 재현하고 불멸을 꿈꾸는 문화적 실험이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인간이 끝내 잊히지 못하는 존재로 남는 새로운 비극이기도 하다. 사피엔스의 첫 기억이 생존을 위한 기록이었다면, 디지털 유산은 존재를 증명하기 위한 기록이다. 기술은 진보했지만, 인간은 여전히 같은 질문 앞에 서 있다. “나는 왜 남기려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