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유산

디지털 유산의 주인은 누구인가 – 공공 관리와 국제 제도 비교

steady-always 2025. 4. 21. 20:00

1. 사망자의 계정은 누구의 것인가 디지털 상속의 법적 공백

현대인은 생전의 대부분의 시간을 온라인에서 보낸다. SNS 계정, 이메일, 클라우드에 저장된 사진과 문서, 유튜브 채널과 같은 콘텐츠 플랫폼, 심지어는 게임 속 아바타와 암호화폐 지갑까지우리는 디지털 공간에 다양한 형태의 자산과 흔적을 남기고 떠난다. 하지만 한 사람이 사망했을 때, 이 방대한 디지털 유산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는 여전히 전 세계적으로 명확한 기준이 없는 상황이다.

 

일반적으로 디지털 유산은 전통적 유산법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온라인 플랫폼은 계정 이용약관을 통해 타인에게 양도 불가능한 일신전속적인 권리로 규정하며, 사망 이후에도 계정을 폐쇄하거나 일정 기간 후 삭제한다. 이 때문에 유족들은 고인의 데이터를 열람하거나 보존하는 데 법적 제약을 받는다. 특히 한국에서는 디지털 유산에 대한 별도의 상속법이 존재하지 않아, 실질적으로 유족이 사망자의 이메일이나 SNS 데이터를 요구해도 거부당하는 일이 빈번하다.

 

이에 따라 사후 계정 보호법의 제정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고인의 동의 여부, 유족의 권리, 개인정보 보호와 같은 복잡한 법적 이해관계를 조율하기 위해선 단순한 민간 차원의 해결을 넘어 국가 차원의 제도적 개입이 요구된다.

디지털 유산의 주인은 누구인가 – 공공 관리와 국제 제도 비교

2. 공공이 개입해야 하는 이유 민간 플랫폼의 한계와 국가의 역할

현재 디지털 유산의 대부분은 민간 플랫폼 기업에 의해 좌우되고 있다. 메타(구 페이스북), 구글, 애플 등은 각자의 방식으로 사망자 계정 관리 정책을 마련해놓고 있지만, 그 기준은 회사 내부 규정에 불과하며 공공성을 갖추고 있지 않다. 예를 들어, 메타는 이용자가 생전 설정해둔 추모 계정 관리자가 없는 경우, 계정을 삭제하거나 접근을 막는다. 이 과정에서 유족의 의사나 고인의 사회적 기여도는 충분히 반영되지 않는다.

 

또한 민간 기업은 언제든 정책을 바꿀 수 있으며, 데이터 서버의 물리적 위치가 해외일 경우 각국의 법적 규제가 미치지 못하는 사각지대가 생기기도 한다. 바로 이러한 지점에서 국가 또는 공공기관의 개입 가능성이 대두된다. 디지털 유산을 단순한 개인 자산으로 보기보다, 사회문화적 기록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시각이다. 이는 디지털 시대의 공공 기록이라는 개념으로도 확장될 수 있다.

 

이러한 흐름은 이미 일부 국가에서 시작되고 있다. **유럽연합(EU)**디지털 콘텐츠 보호와 사망자의 정보 접근 권리를 조율하기 위한 논의를 지속 중이며, 독일과 프랑스는 디지털 자산을 유산의 일부로 보고 법적 상속을 허용하고 있다. 이처럼 국가는 단순한 규제자가 아니라, 공공 데이터 보관소를 운영하거나, 사망자 계정의 보존 기간과 이용 권한을 규정하는 입법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3. 데이터 보관소의 가능성 디지털 유산의 공공화 모델

디지털 유산을 민간이 아닌 **공공 데이터 보관소(Public Data Vault)**에서 보관·관리하자는 제안은 점차 현실적인 대안으로 부상하고 있다. 이는 국가 혹은 지방정부가 일정 기준에 따라 사망자의 온라인 자산을 안전하게 저장하고, 유족의 요청 또는 고인의 생전 동의에 따라 열람·활용할 수 있도록 중재하는 구조다.

 

예를 들어, 고인이 생전에 자신의 SNS 기록, 사진, 이메일, 유튜브 영상 등을 디지털 유언장 또는 정부 인증 플랫폼을 통해 사전에 기탁한다면, 이는 사망 이후 디지털 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지정 기간 동안 보존될 수 있다. 이러한 시스템은 단순히 유족을 위한 서비스에 그치지 않고, 고인의 생애 기록을 사회적 자료로 남기는 아카이빙 기능까지 수행할 수 있다. 특히 교육기관이나 연구자들이 고인의 디지털 기록을 바탕으로 당대의 사회문화적 흐름을 연구하는 데에도 활용될 수 있어, 공공 기록으로서의 가치가 높아진다.

 

이런 모델은 역사적 인물, 예술가, 공익 활동가 등의 디지털 흔적을 보존하는 데 특히 유용하며, 사후에도 사회적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게 돕는다. 동시에 일반 시민 또한 생전의 기록을 '사회적 유산'으로 남길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사망자의 정보가 상업화되지 않고, 투명하고 공정하게 관리될 수 있는 법적·제도적 안전장치가 갖추어져야 한다는 점이다. 이를 위해 국가가 기술 인프라뿐만 아니라 개인정보 보호 시스템, 열람 요청 검토 절차 등을 정비해야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국가의 주도적 참여는 공공성과 신뢰를 동시에 확보하는 열쇠가 된다.

 

4. 제도적 공백과 국제 비교 디지털 유산의 법제화 방향

디지털 유산의 제도화는 아직 전 세계적으로 일관된 기준이 없는 분야지만, 몇몇 국가는 이미 관련 법제 마련에 나서고 있다. 독일은 2018년 연방대법원 판결을 통해 디지털 자산도 상속 대상이라는 입장을 명확히 했으며, 부모가 자녀의 페이스북 계정에 접근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함으로써 유산의 법적 지위를 부여했다. 프랑스 역시 사용자가 사망 후 자신의 데이터를 어떻게 처리할지를 명시할 수 있도록 디지털 유언 등록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미국은 주 단위로 상속법 개정이 이뤄지고 있으며, ‘디지털 자산 접근 및 이용에 관한 통일법(RUFADAA)’을 통해 유족이 이메일, 클라우드, SNS 등 다양한 자산에 접근할 수 있도록 법적 기반을 마련하고 있다.

 

반면, 한국은 아직 디지털 유산 관련 입법이 부재한 상태다. 민법이나 상속법 어디에서도 디지털 자산이라는 개념이 명시적으로 정의되어 있지 않으며, 정보통신망법이나 개인정보보호법에 일부 단서 조항이 존재할 뿐이다. 그마저도 유족의 접근 권한을 명확히 규정하지 않기 때문에 실무상 상당한 제약이 따른다. 심지어 디지털 유언장도 아직 법적 효력이 불명확하여 제도적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각국의 사례는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디지털 유산은 단순한 사적 자산을 넘어선 사회적 기록이며, 디지털 주권과 연결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를 제도화하기 위해선 첫째, 디지털 자산을 상속 가능한 재산으로 명확히 규정하고, 둘째, 본인의 생전 선택을 반영할 수 있는 디지털 상속 설계권을 보장해야 한다. 셋째, 국가 또는 공공기관이 사망자 데이터를 일정 기간 안전하게 보존할 수 있는 데이터 보관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 넷째, 유족의 열람 권한과 개인정보 보호 사이의 균형을 고려한 절차적 기준이 필요하다.

 

특히 한국의 경우, 독일이나 미국처럼 민간 플랫폼과의 협력 아래 공공기관이 실질적인 조정자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법-기술-행정이 연동된 시스템 구축이 필요하다. 정보문화진흥원, 국가기록원, 개인정보보호위원회 등이 공동으로 참여하는 디지털 유산 전담 기구를 구성해 법안 마련, 기술 표준화, 사회적 인식 개선 등을 총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디지털 시대의 유산은 더 이상 삭제되는 것이 아니라, ‘보호받아야 할 권리이며, 그 기준을 만들어가는 것이 지금 우리 사회의 과제다.

 

지금은 디지털 자산도 물리적 유산만큼 보호받아야 할 시대다. 이를 위한 제도 설계는 더 이상 선택이 아닌, 시대적 책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