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유산

기억의 디지털 편향 – 기록되는 삶과 사라지는 존재

steady-always 2025. 4. 19. 11:00

디지털 기억의 편향

기록되는 삶과 사라지는 존재 현대 사회에서 기억은 더 이상 사람의 머릿속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사진, 영상, , SNS 게시물 등 디지털 매체를 통해 개인의 일상은 수많은 정보 단위로 변환되어 축적된다. 이 중 일부는 시간이 지나도 디지털 유산으로 남는다. 그러나 이 기억의 축적 과정은 중립적이지 않다. 디지털 기억의 형성은 기술 접근성, 사회적 지위, 정보 확산력에 따라 불균형을 드러낸다. 유명인의 SNS 계정은 팬들의 참여로 오랫동안 온라인에 남지만, 사회적 소수자의 흔적은 쉽게 삭제되거나 주목받지 못한 채 사라지기도 한다. 디지털 공간은 겉으로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만, 실제로는 기억될 수 있는 자격을 누가 갖는지에 대한 구조적 결정이 이뤄지고 있다. 이로 인해 '기억의 편향'이라는 개념이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디지털 기억은 단순히 데이터를 보관하는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대표성과 존재의 가시성 문제이기도 하다. 검색 결과에 오르내리거나 언론에 노출된 인물만이 디지털 흔적으로 오래 남는다. 반대로, 디지털 리터러시가 낮거나 인터넷 접근이 제한된 고령자, 저소득층, 이주민, 장애인 등은 생전의 기록조차 남기기 어렵다. 이로 인해 디지털 기억 체계에서도 하나의 계층 구조가 형성되고 있으며, 기억되는 사람들과 잊히는 사람들 사이의 간극은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사회적 배제와 디지털 유산

사라진 다수의 흔적 디지털 유산의 생성 과정에서 사회적 소외계층이 배제되는 현상은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난다. 특히 SNS 이용률, 클라우드 기반 데이터 보존, 자동 백업 기능 등에서 계층 간 격차가 뚜렷하다. 고소득층은 더 많은 플랫폼을 사용하고, 일상과 감정을 더 자주 기록하며, 기록된 정보는 안정적인 시스템을 통해 장기적으로 보존된다. 이처럼 디지털 기억은 소득, 교육, 지역에 따라 시작부터 접근 조건이 다르게 설정되어 있다. 반면, 기술적 여건이 열악한 계층은 온라인에 자신의 삶을 남길 기회조차 제한되며, 결과적으로 디지털 유물로 이어질 생전 기록이 부족하다. 단순히 저장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아예 시작조차 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차이는 사망 이후 더욱 뚜렷해진다. SNS 기념 계정, 온라인 추모관, 디지털 헌화 등은 여전히 특정 계층에게만 허용되는 문화로 남아 있다. 일부 지역 커뮤니티나 비영리 기관이 공공 추모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지만, 그 영향력은 주류 플랫폼에 미치지 못한다. 예컨대, 서울 마포구는 고령 1인 가구를 위한 디지털 추모 앨범 제작 지원 사업을 시범 운영한 바 있으며, 남아프리카공화국의 TRC 아카이브는 인권 침해 피해자들의 생애 기록을 국가 차원에서 보존하고 있다. 이러한 사례는 기술적 기반이 취약한 이들에게도 기억될 기회를 제공하고자 한 시도로 평가된다. 더욱이 누군가는 디지털 흔적 없이 생을 마감하며, 디지털 사회 안에서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여겨진다. 이와 같은 현상은 개별적 선택이나 노력의 문제가 아니라, 시작부터 기회를 제한받은 구조 속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배제는 단순히 개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인 기억 형성의 문제로 바라보아야 한다.

 

알고리즘이 만드는 기억

무엇이 보이고 무엇이 지워지는지 디지털 기억의 구성과 확산은 단순한 이용자 선택이 아니라, 플랫폼 설계와 알고리즘에 의해 크게 좌우된다. 유튜브, 인스타그램, 틱톡 등 대형 플랫폼은 이용자의 관심을 붙들기 위해 알고리즘을 통해 콘텐츠를 자동 선별하고 노출시킨다. 이 과정에서 사망자에 대한 추모도 하나의 콘텐츠로 소비된다. 유명인의 사망 소식은 빠르게 확산되며, 알고리즘은 이를 반복적으로 추천하고 노출시킨다. 이렇게 알고리즘은 디지털 기억의 '증폭자'이자 '검열자'로 기능하며, 기억의 형성과 유통을 사실상 통제한다. 미국에서는 유명 배우의 사망 직후, 알고리즘이 팬 영상과 인터뷰를 상위에 배치하여 관련 콘텐츠가 수천만 회 이상 노출된 사례도 있다. 이러한 현상은 기억의 형성이 자율적인 과정이 아니라, 철저히 설계된 구조 속에서 작동함을 보여준다.

기억의 디지털 편향 – 기록되는 삶과 사라지는 존재

표면적으로 알고리즘은 사용자 맞춤형 정보를 제공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더 많은 클릭을 유도할 수 있는, 상업적 가치가 높은 콘텐츠를 우선시한다. 팬 영상, 인터뷰 클립, 복원된 목소리 등은 연예인의 이미지를 고정시키고 반복 소비하게 만든다. 반면, 일반인이나 사회적 약자의 사망은 뉴스에도 오르지 못하고, 플랫폼 내부에서 검색조차 되지 않으며, 디지털 망각의 대상이 된다. 이처럼 알고리즘은 기술적으로 중립적인 듯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사회적 위계를 반영하고 강화하는 기제로 작동하고 있다.

일부 플랫폼은 사용자의 감정 반응 데이터를 분석해 콘텐츠 추천에 반영하기도 한다. '감동적인 이야기', '눈물 나는 사연'이 더 자주 노출되고, 이는 사망자의 생전 모습이 아닌 감정적으로 소비 가능한 이미지로만 재현되는 현상을 낳는다. 결국 고인의 삶은 서사나 맥락이 제거된 채, 감정 유발 장치로만 활용될 위험이 커진다. 디지털 기억은 생전의 존재보다는 사후에 형성된 이미지에 의해 결정되는 구조로 전락하고 있다.

 

기억의 민주화를 향해

포용적 디지털 아카이브 구축 기억의 불균형을 해소하려면, 디지털 유산이 생성되고 보존되는 구조를 재설계해야 한다. 현재 디지털 기억의 대부분은 민간 상업 플랫폼에 의해 형성되고, 사회적 약자나 비주류의 이야기는 그 안에서 쉽게 누락된다. 기억은 단순한 저장 행위가 아닌, 어떤 방식으로 보관되고 누구에 의해 관리되는가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 그러므로 기억의 민주화를 위해서는 기술 기반뿐 아니라, 이를 운영하는 윤리적 기준과 제도적 장치가 함께 마련되어야 한다.

기술 접근성의 격차 해소는 가장 기본적인 전제다. 디지털 교육 확대, 공공 와이파이 제공, 무료 클라우드 서비스 등은 단지 기술 복지 차원이 아니라, 존재를 기록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는 인권적 조치다. 고령자, 농촌 거주자, 장애인, 이주민 등 디지털 접근성이 낮은 사람들도 자신의 삶을 디지털로 표현하고 남길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사회 전체의 기억을 풍부하게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두 번째로, 공공기관과 지역사회 주도의 디지털 아카이빙 시스템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디지털 기억은 개인이 민간 플랫폼에 의존해 임의로 저장하는 수준에 머물렀지만, 이제는 사회적 구조 안에서 운영될 수 있는 기억 보존 시스템이 마련되어야 한다. 국가기록원, 지자체 도서관, 비영리 플랫폼 등을 통해 다양한 정체성과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안전하게 기록하고 공유할 수 있는 구조가 절실하다.

또한 알고리즘 설계에서 '기억의 형평성'이 고려되어야 한다. 현재의 추천 시스템은 상업성과 대중성을 기준으로 콘텐츠를 노출하지만, 향후에는 사회적으로 주목받지 못한 이야기에도 노출 기회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개편될 필요가 있다. 이는 기술적 조정만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라, 사회적 가치 판단이 반영된 윤리적 설계가 요구된다. 기억의 불균형은 기술의 책임이자 사회의 선택의 문제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기억의 민주화를 위한 시민 참여 기반의 문화 형성이 중요하다. 디지털 유산은 사망 이후에만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들의 일상과 감정, 생각과 목소리가 담긴 과정이다. 누구나 자신의 삶을 기록하고 공유하며, 타인의 기억을 존중하고 함께 보존하는 문화가 형성되어야 한다. 지역 공동체의 디지털 자서전, 시민 참여형 아카이브, 구술 아카이빙 앱 등은 그 실천적 모델이 될 수 있다.

 

디지털 기억의 민주화는 단순히 기술의 진보가 아니라, 어떤 삶을 기억할 가치가 있는가에 대한 사회의 응답이다. 지금 우리가 쌓아가는 디지털 기록은 곧 미래 세대가 마주할 사회의 기억 지형이 된다. 그렇기에 우리는 누구나 기억될 권리를 지니며, 그 기억을 지키는 책임은 공동체 전체가 나누어야 한다.